피츠버그에서 박찬호를 영입한 까닭은?

피츠버그에서 박찬호를 영입한 이유는불펜에 도움이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나이어린 투수들이 많은 팀에 꼭 . "그와 함께 있는 것 만으로도 17년간의 메이저리그 경험을 공유하게 된다." 라고.  팀에서는 37세 베테랑의 존재를 피칭능력보다 더 가치 있게 보고 있다는 것이다.
피츠버그에서 박찬호는 가장 나이가 많고 경험이 많은 리더로서의 역할을 책임지고 있다.

얼마 전 존경하는 선배 선생님 한 분이 명예퇴임을 하셨다.
학교가 점점 나이든 사람이 공존할 수 없는 곳으로 변해가고, 그 변화가 인격적으로 심한 상처를 주었다고 말씀하시던 것이 기억난다.
그분은 선생님이기 전에 훌륭한 인품을 지닌 어른이셨다. 어떤 상황이 발생할 때 , 지혜로움을 보여주며 처리하셨고, 학생들과 신뢰를 주고 받는 분. 동료 교사들에게 존경을 받는 분이 분명했다. 그런데, 학교에 불어닥친 경쟁위주의 각종 정책과 평가의 칼날이 섣부르게 날뛰더니...우리 곁에서 존경받는 선배를 하나씩 몰아내고 있다. 그분은 건강이 허락하는 한 학교에서 학생과 교사의 귀감이 되시기에 충분했다. " 함께 있는 것 만으로도 인생을 성찰하는 지혜를 배울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 주위에 진정한 선배는 없다.

언젠가 아마도 내가 초임시절이었던 것 같다. 학교에 말썽을 부리는 아이들 때문에 학부형을 학교에 내방케하는 문제에 대하여 질문들 드린 적이 있다. 이런 대답을 하셨다. " 선생님! 자식은 겉을 낳지 속을 낳는 것이 아니에요..." 물론 학부형과 의논하지 말라는 말씀은 아니었다. 다만, 경솔하게 행동하지 말라는 완곡한 표현...늘 이런 식의 조언을 주셨던 분이다.

우리는 너무 새것과 새로운 시스템을 환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너무 연륜을 무시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물론 나이를 핑계로 세상의 변화에 무심하여 조언을 한마디도 구할 수 없는 사람도 그득하다. 문제는 선배다운 선배는 자존심의 손상을 받고 학교를 떠나고, 남아있는 사람들은 존경은 커녕 바람직하지 않은 본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정말 마음 아프다.

박찬호의 피칭실력 보다도, 그의 인격과 연륜이 주는 리더십을 중시할 수 있는 것이 미국의 강점이겠다.
가치있는 것을 존중할 줄 아는 사회. 새파란 경쟁과 성과보다 그윽한 인격과 지혜를 천천히 존중할 수 있는 사회가 될 수 있을까? 우리 사회가 말이다.

by 나시니 | 2010/09/01 14:25 | 어렵게 꺼내기 | 트랙백 | 덧글(0)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은 자유를 향한 투쟁이다.


색감과 내용이 매우 인상적인 그림이다.
서늘한 의지와 포근함과 두려움이 공존한다.
세상에 던져진 삶들은 우선 두려움을 느낀다. 알 수 없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내게 주어진 시간을 어떻에 엮어갈 것인가...
어쩌면 재수없게도 인간의 존엄함이란 것이 깃털보다 가벼운 세상에 던져진 저 먼 나라의 아주 작은 생명에게도 희망은 있을까?
때로 존엄함이라는 인간의 본질적 가치가 재수와 운명에 따라 주어지기도 하고, 그 개념의 존재감조차 무색한 곳도 있다.
아니, 더 많다.
그런 끔찍한 세상에도 아름다움은 존재할런지...

내가 꿈꾸고 그리는 세상은 아름다운 세상이다.
아름다움은 내가 태어나 살아가는 이유이다.
그런데, 아름다움은 자유를 전제로 하며, 자유는 시대의 아픔과 동고동락한다.
그래서 내가 추구하는 아름다움은 자유를 향한 투쟁이다. 자유가 없이는 아름다움도 없기 때문이다.
자유는 고통과 아픔을 동반한다.
이 세상에는 자유와 아름다움을 여지없이 짓밟고 오히려 그 반대의 소멸하는 가치로 시대의 위상을 왜곡하고 있는 존재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꺽이지않으려 한다.
삶의 이유가 바로 거기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by 나시니 | 2010/03/30 22:28 | 어렵게 꺼내기 | 트랙백 | 덧글(0)

인간의 미적 교육에 관한 서한 (13)

제 13서한

<감성적 충동>은 변화를, <이성적 충동>은 불변성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에 둘은 반목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 두 충동은 인간성의 개념을 전부 차지해버립니다. 그래서 이 두 충동을 중재할 수 있을 제 3의 기본충동은 단연코 생각할 수 없는 개념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이 <두 충동간의 >근원적이고 철저한 대립을 통해서 완전히 지양되어 버린 것처럼 보이는 인간 본성의 통일을 회복할 수 있겠습니까?

이 두 충동의 경향이 서로 반목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분명히 주목해야 할 점은, 그들은 동일한 대상에서 서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서로 마주치지 않는 것은 서로 충돌할 수 없는 법입니다. 감성적 충동은 사실 변화를 요구하지만, 그 변화가 인격과 그 영역에까지 미치는 것, 즉 원칙들의 변화를 요구하지는 않습니다. 형식충동은 통일성과 지속성을 요구하지만, 그러나 형식충동은 인격과 더불어 상태 또한 고정되기를 원하지 않으며, 감수의 동일성을 바라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두 충동은 본질상 서로 대립되어 있지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서로 대립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것은 그들이 우선 본성의 영역을 제멋대로 침범함으로써, 즉 그들이 각자 자신들의 본성과 기능을 잘못이해하여 자신들의 유효범위를 혼란시킴으로써 생긴 일입니다. 이들을 감시하고 이 두 충동에게 각각 그들의 경계선을 보호해주는 것이 문화의 임무입니다. 그러므로 문화<=교육>는 이 두 충동에게 불편부당한 공정을 지킬 책임이 있고, 감성적 충동에 대항하여 이성적 충동을 주장할 뿐만 아니라, 이성적 충동에 대항하여 감성적 충동을 주장해야 합니다. 따라서 문화의 업무는 이중적입니다. 요컨데 문화의 업무는 첫째, 자유의 간섭에 대해서 감성을 수호하고, 둘째, 감정의 압력에 대해서 인격을 안전하게 보호해야합니다. 문화는 감정능력의 함양을 통해 전자에 도달하고, 이성능력의 함양을 통해 후자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세계는 시간속의 외연, 즉 변화이기 때문에 인간을 세계와 결합시키는 그 능력의 완성은 최대의 가변성과 외향성<=확장성>이어야 할 것입니다. 인격은 변화 속에서 지속이기 때문에 변화에 대항해야하는 그 능력의 완성은 최대의 자주성과 내향성<=집중성>이어야 할 것입니다. 감수성<=수용력>이 다양하게 발달하면 발달할수록, 그것이 가동적이면 가동적일수록, 그리고 그것이 현상들에게 더 많은 표면을 제공하면 제공할수록, 인간은 더욱 더 많은 세계를 파악하고 더욱 더 많은 소질을 자신 속에서 발전시킵니다. 인격이 힘과 깊이를 많이 얻으면 얻을수록, 이성이 자유를 많이 얻으면 얻을 수록 인간은 세계를 더욱 더 많이 파악하고 더욱 더 많은 형식을 자기 밖에 창조합니다. 그러므로 인간 문화의 실체는 첫째, 감수능력<=수용능력>에게 세계와의 가장 다양한 접촉을 마련해주고 감정측에서 수동성을 최고도로 강화하고, 둘째, 규정능력에게 감수능력으로부터의 최고의 독립성을 얻게하고 이성측에서 능동성을 최고도로 강화하는 것입니다. 이 두가지 특성이 결합될 때, 인간은 존재의 최고의 충만함을 최고의 자주성 및 자유와 결합하고 , 세계에서 자기 자신을 상실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계의 온갖 무한한 현상들과 함께 그 세계를 자신 속으로 끌어들여 자기 이성의 통일에 종속시킬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이러한 <감성적 소재충동과 이성적 형식충동의 >관계를 전도시켜서 이중의 방식으로 자기규정을 그르칠수 있습니다. 그는 능동적인 힘이 요구하는 내향성을 수동적인 힘에게 부여할 수 있고, 소재충동을 통해서 형식의 기선을 제압하여 감수능력을 규정능력으로 만들 수가 있습니다. 그는 또한 수동적인 힘에게 제격인 외향성을 능동적인 힘에게 지정할 수 있고, 형식충동을 통해서 소재충동의 기선을 제압하여 감수능력의 자리에 규정능력을 대체할 수도 있습니다. 첫번째 경우에 인간은 결코 자기자신이 되지못할 것이고, 두번째 경우에 그는 결코 다른 어떤 것이 되지 못할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로 그 때문에 이 두가지 경우에 있어서 그는 둘중 어느 쪽도 되지 못할 것이며, 결국에는 영의 상태<=아무것도 아닌 상태>가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감성적 충동이 규정하는 충동이 된다면, 즉 감각이 입법자의 역할을 하고 세계가 인격을 억압한다면, 그 세계가 권력이 되는 정도에 비례해서 그만큼 대상이기를 중단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단지 시간의 내용에 불과한 순간부터 이미 그는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는 결코 아떤 내용도 가지지 못합니다. 그의 인격과 더불어 그의 상태도 지양됩니다. 왜냐하면 이 두가지는 상관개념이기 때문입니다. -변화는 불변의 원리를 요구하고 제한된 현실성은 무한한 현실성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한편 형식충동이 감수하는 충동이 된다면, 즉 사고력이 감수의 기선을 제압하고 인격이 세계의 자리를 대신한다면, 그 인격이 대상의 자리에 침입하는 정도에 비례해서 그만큼 자주적인 힘과 주체이기를 중단합니다. 왜냐하면 불변의 원리는 변화를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단지 형식에 불과한 순간부터 이미 그는 어떤 형식을 가지지 못합니다. 따라서 상태와 더불어 인격도 지양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인간은 오직 자주적인 한에서만 현실성이 그의 외부에 존재하며, 그는 감각적이됩니다. 반면에 그는 오직 감수적인 한에서만 현실성이 그의 내부에 존재하며, 그는 사고력이 됩니다.

그러므로 이 두 충동은 견제가 필요하고, 그리고 그들이 정력으로 간주될 때에는 이완이 필요합니다. 그래야만 소재충동은 입법의 영역에 침입하지 못할 것이고, 형식충동은 감정의 영역에 침입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감성적 충동의 이완이 결코 물리적 무능력이나 우둔한 감정의 결과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러한 이완은 언제나 멸시만을 받을 뿐입니다. 그것은 자유의 행동, 즉 인격의 활동이어야 합니다. 인격이 그 도덕적인 내향성을 통해서 저 감성적인 내향성을 완화시키고 인상들을 지배함으로써 그 인상들에게서 깊이를 빼앗는 대신에 그들에게 표면을 부여해야 합니다. 성격은 격정적 기질을 제한해야합니다. 왜냐하면 오직 정신을 위해서만 감각이 위축되어도 괜찮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형식충동의 이완이 정신적인 무능력과 둔화된 상상력이나 혹은 의지력의 결과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러한 이완은 인간성을 타락시킬 것입니다. 충만한 감수는 그 명예로운 근원이 있어야 합니다. 감성이 스스로 승리하는 힘을 가지고 자신의 영역을 주장하고, 정신의 강압적인 활동에 의해서 자기에게 흔히 가해질지도 모르는 폭력에 저항해야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소재충동을 인격이, 그리고 형식충동을 감수성 혹은 자연이 적절하게 제한하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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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분법에 따라 구분하고 있으며, 각각의 본성에 충실하여야 감성적 충동과 이성적 충동이 조화를 이루어 인간 존재가 최고로 충만한 상태를 이룰 수 있다. 다만 이 두 충동은 적절하게 상호 제한하지않으면 안된다.

by 나시니 | 2009/05/08 00:21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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