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은 자유를 향한 투쟁이다.


색감과 내용이 매우 인상적인 그림이다.
서늘한 의지와 포근함과 두려움이 공존한다.
세상에 던져진 삶들은 우선 두려움을 느낀다. 알 수 없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내게 주어진 시간을 어떻에 엮어갈 것인가...
어쩌면 재수없게도 인간의 존엄함이란 것이 깃털보다 가벼운 세상에 던져진 저 먼 나라의 아주 작은 생명에게도 희망은 있을까?
때로 존엄함이라는 인간의 본질적 가치가 재수와 운명에 따라 주어지기도 하고, 그 개념의 존재감조차 무색한 곳도 있다.
아니, 더 많다.
그런 끔찍한 세상에도 아름다움은 존재할런지...

내가 꿈꾸고 그리는 세상은 아름다운 세상이다.
아름다움은 내가 태어나 살아가는 이유이다.
그런데, 아름다움은 자유를 전제로 하며, 자유는 시대의 아픔과 동고동락한다.
그래서 내가 추구하는 아름다움은 자유를 향한 투쟁이다. 자유가 없이는 아름다움도 없기 때문이다.
자유는 고통과 아픔을 동반한다.
이 세상에는 자유와 아름다움을 여지없이 짓밟고 오히려 그 반대의 소멸하는 가치로 시대의 위상을 왜곡하고 있는 존재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꺽이지않으려 한다.
삶의 이유가 바로 거기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by 나시니 | 2010/03/30 22:28 | 어렵게 꺼내기 | 트랙백 | 덧글(0)

인간의 미적 교육에 관한 서한 (13)

제 13서한

<감성적 충동>은 변화를, <이성적 충동>은 불변성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에 둘은 반목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 두 충동은 인간성의 개념을 전부 차지해버립니다. 그래서 이 두 충동을 중재할 수 있을 제 3의 기본충동은 단연코 생각할 수 없는 개념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이 <두 충동간의 >근원적이고 철저한 대립을 통해서 완전히 지양되어 버린 것처럼 보이는 인간 본성의 통일을 회복할 수 있겠습니까?

이 두 충동의 경향이 서로 반목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분명히 주목해야 할 점은, 그들은 동일한 대상에서 서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서로 마주치지 않는 것은 서로 충돌할 수 없는 법입니다. 감성적 충동은 사실 변화를 요구하지만, 그 변화가 인격과 그 영역에까지 미치는 것, 즉 원칙들의 변화를 요구하지는 않습니다. 형식충동은 통일성과 지속성을 요구하지만, 그러나 형식충동은 인격과 더불어 상태 또한 고정되기를 원하지 않으며, 감수의 동일성을 바라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두 충동은 본질상 서로 대립되어 있지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서로 대립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것은 그들이 우선 본성의 영역을 제멋대로 침범함으로써, 즉 그들이 각자 자신들의 본성과 기능을 잘못이해하여 자신들의 유효범위를 혼란시킴으로써 생긴 일입니다. 이들을 감시하고 이 두 충동에게 각각 그들의 경계선을 보호해주는 것이 문화의 임무입니다. 그러므로 문화<=교육>는 이 두 충동에게 불편부당한 공정을 지킬 책임이 있고, 감성적 충동에 대항하여 이성적 충동을 주장할 뿐만 아니라, 이성적 충동에 대항하여 감성적 충동을 주장해야 합니다. 따라서 문화의 업무는 이중적입니다. 요컨데 문화의 업무는 첫째, 자유의 간섭에 대해서 감성을 수호하고, 둘째, 감정의 압력에 대해서 인격을 안전하게 보호해야합니다. 문화는 감정능력의 함양을 통해 전자에 도달하고, 이성능력의 함양을 통해 후자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세계는 시간속의 외연, 즉 변화이기 때문에 인간을 세계와 결합시키는 그 능력의 완성은 최대의 가변성과 외향성<=확장성>이어야 할 것입니다. 인격은 변화 속에서 지속이기 때문에 변화에 대항해야하는 그 능력의 완성은 최대의 자주성과 내향성<=집중성>이어야 할 것입니다. 감수성<=수용력>이 다양하게 발달하면 발달할수록, 그것이 가동적이면 가동적일수록, 그리고 그것이 현상들에게 더 많은 표면을 제공하면 제공할수록, 인간은 더욱 더 많은 세계를 파악하고 더욱 더 많은 소질을 자신 속에서 발전시킵니다. 인격이 힘과 깊이를 많이 얻으면 얻을수록, 이성이 자유를 많이 얻으면 얻을 수록 인간은 세계를 더욱 더 많이 파악하고 더욱 더 많은 형식을 자기 밖에 창조합니다. 그러므로 인간 문화의 실체는 첫째, 감수능력<=수용능력>에게 세계와의 가장 다양한 접촉을 마련해주고 감정측에서 수동성을 최고도로 강화하고, 둘째, 규정능력에게 감수능력으로부터의 최고의 독립성을 얻게하고 이성측에서 능동성을 최고도로 강화하는 것입니다. 이 두가지 특성이 결합될 때, 인간은 존재의 최고의 충만함을 최고의 자주성 및 자유와 결합하고 , 세계에서 자기 자신을 상실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계의 온갖 무한한 현상들과 함께 그 세계를 자신 속으로 끌어들여 자기 이성의 통일에 종속시킬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이러한 <감성적 소재충동과 이성적 형식충동의 >관계를 전도시켜서 이중의 방식으로 자기규정을 그르칠수 있습니다. 그는 능동적인 힘이 요구하는 내향성을 수동적인 힘에게 부여할 수 있고, 소재충동을 통해서 형식의 기선을 제압하여 감수능력을 규정능력으로 만들 수가 있습니다. 그는 또한 수동적인 힘에게 제격인 외향성을 능동적인 힘에게 지정할 수 있고, 형식충동을 통해서 소재충동의 기선을 제압하여 감수능력의 자리에 규정능력을 대체할 수도 있습니다. 첫번째 경우에 인간은 결코 자기자신이 되지못할 것이고, 두번째 경우에 그는 결코 다른 어떤 것이 되지 못할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로 그 때문에 이 두가지 경우에 있어서 그는 둘중 어느 쪽도 되지 못할 것이며, 결국에는 영의 상태<=아무것도 아닌 상태>가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감성적 충동이 규정하는 충동이 된다면, 즉 감각이 입법자의 역할을 하고 세계가 인격을 억압한다면, 그 세계가 권력이 되는 정도에 비례해서 그만큼 대상이기를 중단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단지 시간의 내용에 불과한 순간부터 이미 그는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는 결코 아떤 내용도 가지지 못합니다. 그의 인격과 더불어 그의 상태도 지양됩니다. 왜냐하면 이 두가지는 상관개념이기 때문입니다. -변화는 불변의 원리를 요구하고 제한된 현실성은 무한한 현실성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한편 형식충동이 감수하는 충동이 된다면, 즉 사고력이 감수의 기선을 제압하고 인격이 세계의 자리를 대신한다면, 그 인격이 대상의 자리에 침입하는 정도에 비례해서 그만큼 자주적인 힘과 주체이기를 중단합니다. 왜냐하면 불변의 원리는 변화를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단지 형식에 불과한 순간부터 이미 그는 어떤 형식을 가지지 못합니다. 따라서 상태와 더불어 인격도 지양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인간은 오직 자주적인 한에서만 현실성이 그의 외부에 존재하며, 그는 감각적이됩니다. 반면에 그는 오직 감수적인 한에서만 현실성이 그의 내부에 존재하며, 그는 사고력이 됩니다.

그러므로 이 두 충동은 견제가 필요하고, 그리고 그들이 정력으로 간주될 때에는 이완이 필요합니다. 그래야만 소재충동은 입법의 영역에 침입하지 못할 것이고, 형식충동은 감정의 영역에 침입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감성적 충동의 이완이 결코 물리적 무능력이나 우둔한 감정의 결과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러한 이완은 언제나 멸시만을 받을 뿐입니다. 그것은 자유의 행동, 즉 인격의 활동이어야 합니다. 인격이 그 도덕적인 내향성을 통해서 저 감성적인 내향성을 완화시키고 인상들을 지배함으로써 그 인상들에게서 깊이를 빼앗는 대신에 그들에게 표면을 부여해야 합니다. 성격은 격정적 기질을 제한해야합니다. 왜냐하면 오직 정신을 위해서만 감각이 위축되어도 괜찮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형식충동의 이완이 정신적인 무능력과 둔화된 상상력이나 혹은 의지력의 결과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러한 이완은 인간성을 타락시킬 것입니다. 충만한 감수는 그 명예로운 근원이 있어야 합니다. 감성이 스스로 승리하는 힘을 가지고 자신의 영역을 주장하고, 정신의 강압적인 활동에 의해서 자기에게 흔히 가해질지도 모르는 폭력에 저항해야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소재충동을 인격이, 그리고 형식충동을 감수성 혹은 자연이 적절하게 제한하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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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분법에 따라 구분하고 있으며, 각각의 본성에 충실하여야 감성적 충동과 이성적 충동이 조화를 이루어 인간 존재가 최고로 충만한 상태를 이룰 수 있다. 다만 이 두 충동은 적절하게 상호 제한하지않으면 안된다.

by 나시니 | 2009/05/08 00:21 | 트랙백 | 덧글(0)

아방가르드, 어디까지인가?

세익스피어의 '햄릿'처럼 자주 새로운 시도로 재현되는 연극은 아마도 없을 것 같다.
심리드라마에서 미스테리에 이르기까지.
하지만, 때로 그 새로운 시도는 혹시나 했다가 역시나 했던 기억에 때로 두려움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이제는 원작을 그대로 보고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질 정도로 너무도 자주 '현대적 해석'이라는 이름으로 관객을 부른다.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다.
성인이 된 남자의 가슴 속에는 어린 날의 트라우마에 의해 얼룩진 커다란 상처가 있다. 그 치명적인 상처로 인해 불행하다.
그 문제의 원인에는 성적 억압과 아버지의 부재, 그리고 혼란과 소외와 단절이 있다.

어린이는 그 자체가 애처롭다. 작고, 여리고, 세상에 대해 알지 못하기 때문에...문제 상황에서 늘 약자이기 때문에...늘 작고 어리다는 이유로 함부로 대해지고, 그 상처를 어루만져 주는 존재는 남자아이에게 있어서 늘 어머니다. 그런데, 그 어머니는 언제나 배신감을 준다. 사춘기의 남자에게 어머니는 성적으로 왜곡되어 비하될 수 밖에 없는 존재다. 그 존재에게 의존해서 어린 날의 고통을 파묻었고, 부정할 수 없는 그 따사로운 기억 때문에 성인이 되어서도 그와 비슷한 체온을 찾는다. 그러나, 완전하게 받아들일 수는 없다. 찾아온 한마리 작은 새처럼 사랑스러운 여자도 어머니가 줄 수 있는 온기를 주지는 못한다. 어쩌면 그러한 존재에게 일부일처제는 가혹한 형벌일지도 모른다. 어떤 식으로든 어린여자와 살지만, 어머니와 같은 푸근함이 없이는 찬물을 몸에 뒤집어쓴 것 처럼 오돌오돌 떨리는 추위를 견디기 어렵기 때문이다.  내일까지 혜화동 로터리 아름다운 극장에서 공연중인 '김현탁의 햄릿'에서 느낀 것이다. 
이 햄릿에서는
'갈매기'의 뜨리고린이 오필리어와 사랑을 나누기도 한다. 사랑하는 여자의 배신과 의심을 다룬 부분이다. 어린 햄릿이 바라보는 가운데, 머리를 감는 오필리어. 막대사탕을 주어 꽃다발처럼 손에 들고 사랑을 고백하는 햄릿.그런데, 오필리어는 뜨레플레프의 니나가 되어 뜨리고린과 모스크바로 가버린다. 오버랩이다. 갈매기의 뜨레쁠레프와 햄릿이.  
그 느낌으로 배신감과 상실감을 표현하다니...

유년기의 혼란과 고립이 비극적인 삶의 원인이 되어 고통을 주는 것이며, 원인이 과거에 있고, 고통은 현재에 있고, 해결은 미래에 있는 것이 비극이며, 연극이 존재하는 이유라고 연출가는 말한다.
...맞다. 현재의 원인은 과거에서 찾을 수 있다.
그 유년기의 원형이 시대성과 역사성을 넘어서 하나의 구조처럼 자리잡고 있는 혼란과 고립이라면.
그리고, 그 원인의 치유가 미래에 달려 있다면.
정작 어린날에는 그 혼란이 혼란이라는 이름으로 인식되지도 않으며, 고립도 원인을 해석할 수 없는 허전함과 슬픔의 정서일 수 밖에없다면. 어린날...꿈을 가꾸는 꽃밭에 나비가 나는 향긋하기만한 시절이 결코 아니므로...

그런데
무대의 새로운 시도는 참으로 불편했다.
편안하고 아름다운  연극을 보려고 기대했던 것은 아니다.
다만, 이 무대가 표현하고자 하는 주제를 진짜 어린 배우가 연기하는 것이...누구의 말처럼 진정한 리얼리티의 표현이라고 느껴지기 보다는 리얼리티에 대한 욕심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기 때문이다. 
어린 배우들의 열연으로 애처로움을 느끼게 하는 것 조차 연출가의 의도였다면  성공적이다. 
그런데, 햄릿 역을 맡은 배우가 아팠던 것 같다. 입안에 물집이 생기고 입술이 부어올라 그러잖아도 발음이 정확하지 않았을 그 어린 배우의 대사는 전혀 전달되지 않았다. 아무말도 들을 수가 없었다. 그조차 의도라고 봐달라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건 사고다.
관객들은 몹시 불편했고, 연극을 보는 동안 햄릿이 아니라 어린 시절의 원형이 아니라, 어린배우가 애처롭다는 느낌만 강하게 전해졌다. 어린날이 애처로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어린날의 트라우마, 그 원형을  과연 진짜 어린이가 표현하는 것이 최선인가 하는 의문이 연극을 보는 동안 내내 맴돌았다.

어린 배우도 배우이기 이전에 어린이다. 이 연극을 준비하는 동안 어린 배우에게  생겼을지도 모르는 트라우마가  걱정되었다. 물론아닐 수도 있고, 아니길 바란다.
다만, 말하고 싶은 것은 배우와 연기에 대한 것이다....리얼리티가 지나치면 무대가 보여주려는 진정성에 혼란이 생긴다. 예술가들의 불행과 비극은 그 자신이 작품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고 객관화 시키지 못해서 생겨나는 일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생각한다. 대개 몰입해서 연기하는 경우에 작품의 캐릭터가 자신에게 내재화되어 한동안 작품 이후에도 고통을 겪는 경우가 많은 것은 이 때문이다. 연기 잘하는 배우는 그 작품 속의 캐릭터를 체화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내 경우에는 조금 인식이 다르다. 배우는 마지막 순간에 자신이 배우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이 작품에서 대사는 없고, 소리만이 옹알이가 되어 메아리 치고 있었다.
옹알이하던 유년시절의 상처를 그대로 보여주고자 했다면, 그 의도는 충분하게 전달되었다.
그래서 그 시절의 혼란과 고립에 대해 성숙한 어른들이 이해하고 다가가려는 마음을 갖도록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면...더더욱 성공이다. 어른과 어린이의 언어가 어디까지 소통될 수 있을지, 평범한 어른들이 얼마나 그 필요성을 이해하고 시선의 각도를 맞추고 다가갈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더우기 상상력이 참으로 부족한 한국의 어른들에게는 엄청난 과제일테지만.

연출가에게 '왜?'냐고 질문할 수 있는 배우가 연기하기를 바라며....
가늘고 여린 팔의 어린 배우에게, 입술이 부르터가면서 연기하였던 그 배우에게 따뜻한 존중의 마음을 보낸다. 진지한 눈빛으로 커튼콜을 받던 그 시선이 어디서 유래한 것인지 궁금했다. 훈련인가, 성장에 의한 성숙인가...

아방가르드...변방의 연극으로 시도와 해석은 손색이 없었으나, 배우와 관객 역시 인간으로서의 존엄함과 미적정서에 대한 배려를 받아야 하는 존재라는 생각에 혼란스런 마음이 가시질 않는다. 

바람이 차고, 비가 내렸다. 
어린날 책가방과 신발주머니, 게다가 폐품가방까지 들고 학교가던 길에 우산을 떨어뜨려 울음이 나왔던 시절이 생각났다.
얼마나 춥고 힘들었던가...무언가 제도화되고 만들어진 형식을 그저 배우고 따라야만 했던 그 시절이.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인가.

이 모든 정서와 해석은
어디까지나 모든 것을 교육의 문제로 환원하고야 마는 내 자신의 경험과 인식의 한계일런지도 모른다.

아방가르드...경계를 허무는 연극을 보고 난 감상이다.


by 나시니 | 2009/04/26 00:17 | 아름다움에 대하여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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