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04월 18일
인간의 미적 교육에 관한 서한(10)
제 10서한
당신께서는 인간이 상반된 두 길로 자신의 목적을 이탈 할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우리 시대는 실제로 이 두 사도(邪道)를 헤매며 한편으로는 조야의, 다른 한편으로는 이완과 전도의 희생이 되고 있다는 사실에 있어서 저와 일치하시고, 또 저의 앞 선 서한들의 내용을 통해서 그 사실을 확신하고 계십니다. 이러한 이중의 혼란으로 부터 우리 시대는 미를 통해 회복되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어떻게 미적 교육은 이 상반된 두 결함과 동시에 대처해서 이 모순된 두 특성을 자신 속에서 결합할 수 있겠습니까?
미적 교육은 과연 야만인의 경우 본성<=자연적 충동>을 쇠사슬로 묶어 놓고 비문화인의 경우 그것을 자유롭게 풀어놓을 수가 있겠습니까? 미적 교육이 구속과 동시에 해방을 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만약에 미적 교육이 이 두가지 일을 실행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우리는 인간성의 완성이라는 중요한 결과를 그것으로부터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미에 대해 발달한 감정은 풍습을 세련시킨다는 주장을 우리는 이미 넌더리 나도록 들었습니다.
이러한 주장은 명쾌한 지성, 활발한 감정, 관용 및 심지어는 품위있는 태도마저도 거의 일반적으로 세련된 취미와 결합시키고, 그 반대의 것은 보통 세련되지 못한 취미와 결합시키는 일상의 경험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또한 고대의 가장 교화된 민족<=희랍인>의 경우 미적 감정 역시 최고로 발달했다는 실례와 동시에, 그 반대로 일부는 야만적이고 일부는 미개한 민족의 경우 미에 대한 무감각의 댓가로 조잡하거나 무뚝뚝한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는 실례를 근거로 삼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상가들의 생각은 때때로 그 사실을 부인하거나 혹은 그 사실로부터 도출된 결론의 합법성을 의심합니다. 그들은 미개한 민족들이 비난받는 저 야만을 전적으로 그렇게 나쁘게만 생각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그들은 개화된 민족들이 칭찬받는 이 세련된 전적으로 그렇게 좋게만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이미 고대에 미적 문화를 결코 은총이라고 간주하지 않고,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상상력의 예술가들이 자기들의 공화국에 들어오는 것을 거부하는 경향이 심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컨데 플라톤의 [국가론]은 부분적으로 예술가들이 그의 공화국에 들어오는 것을 거부하고 있다.>
저는 오직 자신들이 고대 로마의 우미의 세 여신들<=희랍신화에서는 Aglaia, Euphrosyne, Thalia>이 베푸는 은총을 결코 한번도 경험하지 못했다는 이유 때문에 그 여신들을 비방하는 사람들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획득의 노고와 손에 잡을 수 있는 이득 이외에는 어떤 다른 가치척도를 모르는 그들이 어떻게 인간의 내부와 외부에 대한 취미의 조용한 노력의 가치를 인정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어떻게 그들이 미적 문화의 우연한 단점들 때문에 그 본질적인 장점들을 도외시하지 않겠습니까? 형식을 갖추지 목한 인간<=세련되지 못하고 예의 범절과 격식을 갖추지 못한 조야한 인간>은 모든 우아한 화술을 아첨이라고, 모든 세련된 사교를 위장이라고, 모든 섬세하고 고결한 태도를 지나친 긴장과 점잖뺌이라고 하여 경멸합니다. 그는 우미의 여신들의 총아가 자신의 동반자로소 모든 행동 반경을 명랑하게 하고, 사무가로서 모든 두뇌들을 자기의 의도대로 지배하고, 그리고 작가로서 자신의 세기 전체에 자신의 정신을 불어 넣은 것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런 반면에 근면의 희생자인 그는 자신의 모든 지식을 가지고서도 결코 주목받지 못하고, 그 자리로부터 어떤 장해물 하나도 제거할 수가 없습니다. 그는 저 우미의 총아로부터 쾌적하게 지내는 독창적인 비밀을 결코 터득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본질보다는 오히려 가상을 섬기는 전도된 인간의 본성을 한탄하는 일 이외에는 별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미의 작용에 반대하고 그리고 경험에 기반을 둔 이 논지를 반박할 무서운 근거를 갖추고 있는 주목할 만한 목소리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말인즉, "미의 매력은 착한 사람의 손에 들어 있으면 찬양할 목적을 위해 작용할 수 있지만, 그러나 나쁜 사람의 손에 들어갈 경우에는 정반대의 것을 행하여 그 현혹적인 힘을 과오와 부정을 위해 사용할 수 있다. 그것은 또한 미의 본질에 모순되지 않는다. 취미는 단지 형식에만 주목하고 내용은 간과하기 때문에, 인간의 심정에게 결국에는 모든 현실성을 대체로 소홀히 하고, 매력적인 표현 때문에 진리나 도덕성을 희생하게 될 위험한 방향을 제시할 것이다. 사물들 사이의 모든 본질적인 차이가 사라지고, 오직 현상만이 사물들의 가치를 결정한다. "
그들은 또 계속해서 말합니다."미의 현혹적인 힘 때문에 수많은 유능한 사람들이 진지하고 긴장이 되는 활동으로 부터 이탈하거나 혹은 적어도 그 활동을 피상적으로 취급하려는 과오를 저지를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현실세계와는 전혀 다른 결과가 생겨나고, 어떤 전통적인 인습도 국민의 의견을 속박하지 않고, 인위가 자연본능을 억압하지 않는 하나의 시적 세계를 제시하는 것이 시인의 상상력에는 흡족하기 때문에, 많은 나약한 지성은 시민제도와 일치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시인들의 상상의 세계에 있어서 정열이 가장 화려한 색채를 과시하고 법칙과 의무와 싸워서 보통 영역을 확보한 이래, 그 정열은 어떤 위험한 웅변술을 터득하지 않았던가? 예전에는 진실이 지배했던 사교의 법칙을 이제는 미가 제시하고, 그리고 실질적인 공적만이 받아야 마땅할 존경을 외부적인 인상이 결정한다면, 사회는 과연 무엇을 얻게 되겠는가? 현상에 있어서 사람들의 호감을 살 수 있고 사회에 있어서 어떠한 가치를 부여하는 미덕이라면 모든 것이 번창한다. 그러나 그 반대라면 모든 탈선이 횡행하고 아름다운 겉치장과 타협하는 모든 악덕이 유행함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예술이 번창하고 취미가 지배하는 역사상 거의 모든 시대에 잇어서 인간성의 타락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어느 한 민족에게 있어서 높은 정도로 널리 보편화된 미적 문화가 정치적 자유 및 시민적 미덕과, 아름다운 관습이 선한 관습과, 그리고 태도의 우아함이 그 진실성과 융합되어 원만하게 발전한 실례를 단 하나도 역사상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은 틀림없이 깊은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제각기 독립을 주장하고 율법의 존중이 그들의 국가제도의 토대가 되고 있는 동안에 , 취미는 아직 성숙하지 못했고, 예술역시 아직 미숙한 상태에 있었으며, 그리고 미가 인간의 심정을 지배하기에는 아직 부족한 점이 많았습니다. 물론 시문학은 이미 숭고한 비약을 했지만, 그러나 그것은 단지 천재의 날개에 의해서만 비상했을 뿐입니다. 우리가 다 알고 있듯이 그것은 야만과 가장 가까이 경계를 이루고 흔히 암흑 속에서 빛나는 하나의 빛이었을 뿐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그 시대의 취미를 위해서 유리한 증언보다는 오히려 불리한 증언을 하고 있습니다. 페리클레스<=그리스 아테네의 정치가(499-429 B.C)>나 알렉사드로스<=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356-323 B.C>의 치하에서 예술의 황금시대가 도래하고 취미의 지배력이 널리 보급되었을 때, 그리이스의 힘과 자유는 더 이상 발견되지 않았고, 웅변술은 진실을 왜곡했고, 지혜는 소크라테스의 입에서 나왔지만 모욕을 받게 되었고 미덕은 포키온 장군의 태도에 나타났지만 모욕을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로마인들은 맨 처음에는 시민전쟁으로 자신들의 힘을 소모하고, 그 다음에는 동양의 사치를 통해서 무기력해지고, 결국에는 행복한 주권자의 멍에에 굴종한 연후에 희랍예술은 그들의 성격적 경직성을 극복하고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아라비아인들의 경우에 있어서도 압바스 왕조<=750-1280년 사이의 바그다드 회교도 교주들의 왕조, 모하메드의 백부 압바스의 후손들>의 왕흘 하에서 그들의 전투적인 정신의 기력이 완화될 때까지는 전혀 문화의 서광이 비치지 않았습니다. 근대 이탈리아에서는 찬란한 롬바르디아 자유도시 국가동맹이 깨어지고, 플로렌츠가 메디치 가문에 종속되고 자주정신이 저 용기가 넘치는 모든 도시에서 불명예스러운 항복에 자리를 양보한 후에 아름다운 예술이 나타났습니다. 근대국가들의 경우에 있어서 그들의 자주성이 종식하는 정도에 비례하여 그만큼 그들의 세련미가 증가한 실례는 너무나 많으므로 그것을 상기시키는 것은 거의 쓸데없는 일이나 다름없습니다. 어디로든 항상 과거의 세계로 시선을 돌리면, 거기에서 우리는 취미와 자유가 서로 반목하고, 미는 단지 영웅적인 미덕의 몰락위에만 그 지배의 토대를 구축한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지만 미적 문화를 얻기 위해서 보통 희생되곤 하는 이 영웅적 성격의 기력은 바로 인간에게 있어서 모든 우수하고 위대한 것들 가운에 가장 효율적인 용수철이며, 이것의 손실은 다른 어떤 훌륭한 장점을 가지고도 보충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까지의 경험들이 미의 영향에 관해서 가르쳐주는 것에만 오로지 집착할 경우, 실제로 우리는 인간의 진정한 문화에 매우 위험한 감정의 발달을 독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세련된 모든 장점에도 불구하고 미의 이완적 작용을 허락하는 것보다 차라리 조야와 무정이라는 성격상의 손해를 보더라도 미의 융화적인 힘을 습득하지 않고 지내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마도 경험은 이와 같은 미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법정이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경험이 말하는 증언에 대해서 중요성을 인정하기 전에, 우선 우리가 지금 논의하고 있는 미와 저 역사적 실례들이 불리한 증언을 하는 미가 동일한 것인지를 확실히 해둘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논의대상은 경험과는 다른 원천을 가진 미의 개념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경험에서 아름답다고 불리우는 것이 정당하게 그 명칭을 가질만한 것인지 어떤지는 오로지 저 개념에 의해서 판별되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미의 이 순수이성 개념은, 만일 그러한 것이 제시될 가능성이 있다면-이 개념은 하등의 현실적인 경우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현실적인 경우에 관한 우리들의 판단을 먼저 바르게 시정하고 지도하는 것이기 때문에 -추상의 방법으로 구해야 되고 그리고 감성적.이성적 자연의 가능성으로 부터 추정하여야 할 것입니다. 한마디로 해서 미는 인간성의 하나의 필연적인 조건으로서 제시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부터 인간성의 순수개념으로 향상되어야 합니다. 경험은 단지 개별적 인간들의 개별적 상태만을 제시할 뿐 결코 인간성을 제시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경험의 개별적이고 가변적인 현상방식으로 부터 절대적이고 불변하는 것을 발견해야 하고, 그리고 모든 우연한 한계를 제거함으로써 그 존재의 필연적인 조건을 장악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사실 이러한 선험적인 방법은 한동안 우리를 친숙한 현상세계와 사물의 생생한 현재로 부터 멀어지게 하고 순수추상개념의 세계에 머무르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절대로 동요하지 않는 인식의 확고한 근거를 얻으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현실을 과감하게 극복하지 못하는 사람은 결코 진리르르 획득하지 못할겁입니다.
=========================
칸트의 원리에 입각하다.
미의 순수 이성 개념은, 추상의 방법으로 구해야 되고 감성적 이성적 자연의 가능성으로 부터 추정해야 한다. 미는 인간의 필연적 조건으로 제시도어야 하며, 이제 인간성의 순수개념으로 향상되어야 한다.
경험은 개별인간의 개별적 상태만 제시할 뿐이므로 절대적 불변하는 것을 발견해야 하고 그 존재의 필연적인 조건을 찾아야 한다. 이러한 선험적인 방법은 순수 추상개념의 세계에 머물게 한다. 그러나 이것은
인식의 확고한 근거를 얻으려는 노력이다. 현실을 과감하게 극복하지 못하면 진리를 얻을 수 없다.
인간성의 순수개념으로 향상된 미의 순수이성 개념은 우연성을 배제하고 절대적인 인식의 확고한 근거 속에서 찾을 수 있다.
그렇게 얻은 미의 순수이성 개념은 현재 세계의 이중적인 문제(구속과 해방을 주어야 하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조건이 된다.
당신께서는 인간이 상반된 두 길로 자신의 목적을 이탈 할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우리 시대는 실제로 이 두 사도(邪道)를 헤매며 한편으로는 조야의, 다른 한편으로는 이완과 전도의 희생이 되고 있다는 사실에 있어서 저와 일치하시고, 또 저의 앞 선 서한들의 내용을 통해서 그 사실을 확신하고 계십니다. 이러한 이중의 혼란으로 부터 우리 시대는 미를 통해 회복되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어떻게 미적 교육은 이 상반된 두 결함과 동시에 대처해서 이 모순된 두 특성을 자신 속에서 결합할 수 있겠습니까?
미적 교육은 과연 야만인의 경우 본성<=자연적 충동>을 쇠사슬로 묶어 놓고 비문화인의 경우 그것을 자유롭게 풀어놓을 수가 있겠습니까? 미적 교육이 구속과 동시에 해방을 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만약에 미적 교육이 이 두가지 일을 실행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우리는 인간성의 완성이라는 중요한 결과를 그것으로부터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미에 대해 발달한 감정은 풍습을 세련시킨다는 주장을 우리는 이미 넌더리 나도록 들었습니다.
이러한 주장은 명쾌한 지성, 활발한 감정, 관용 및 심지어는 품위있는 태도마저도 거의 일반적으로 세련된 취미와 결합시키고, 그 반대의 것은 보통 세련되지 못한 취미와 결합시키는 일상의 경험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또한 고대의 가장 교화된 민족<=희랍인>의 경우 미적 감정 역시 최고로 발달했다는 실례와 동시에, 그 반대로 일부는 야만적이고 일부는 미개한 민족의 경우 미에 대한 무감각의 댓가로 조잡하거나 무뚝뚝한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는 실례를 근거로 삼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상가들의 생각은 때때로 그 사실을 부인하거나 혹은 그 사실로부터 도출된 결론의 합법성을 의심합니다. 그들은 미개한 민족들이 비난받는 저 야만을 전적으로 그렇게 나쁘게만 생각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그들은 개화된 민족들이 칭찬받는 이 세련된 전적으로 그렇게 좋게만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이미 고대에 미적 문화를 결코 은총이라고 간주하지 않고,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상상력의 예술가들이 자기들의 공화국에 들어오는 것을 거부하는 경향이 심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컨데 플라톤의 [국가론]은 부분적으로 예술가들이 그의 공화국에 들어오는 것을 거부하고 있다.>
저는 오직 자신들이 고대 로마의 우미의 세 여신들<=희랍신화에서는 Aglaia, Euphrosyne, Thalia>이 베푸는 은총을 결코 한번도 경험하지 못했다는 이유 때문에 그 여신들을 비방하는 사람들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획득의 노고와 손에 잡을 수 있는 이득 이외에는 어떤 다른 가치척도를 모르는 그들이 어떻게 인간의 내부와 외부에 대한 취미의 조용한 노력의 가치를 인정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어떻게 그들이 미적 문화의 우연한 단점들 때문에 그 본질적인 장점들을 도외시하지 않겠습니까? 형식을 갖추지 목한 인간<=세련되지 못하고 예의 범절과 격식을 갖추지 못한 조야한 인간>은 모든 우아한 화술을 아첨이라고, 모든 세련된 사교를 위장이라고, 모든 섬세하고 고결한 태도를 지나친 긴장과 점잖뺌이라고 하여 경멸합니다. 그는 우미의 여신들의 총아가 자신의 동반자로소 모든 행동 반경을 명랑하게 하고, 사무가로서 모든 두뇌들을 자기의 의도대로 지배하고, 그리고 작가로서 자신의 세기 전체에 자신의 정신을 불어 넣은 것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런 반면에 근면의 희생자인 그는 자신의 모든 지식을 가지고서도 결코 주목받지 못하고, 그 자리로부터 어떤 장해물 하나도 제거할 수가 없습니다. 그는 저 우미의 총아로부터 쾌적하게 지내는 독창적인 비밀을 결코 터득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본질보다는 오히려 가상을 섬기는 전도된 인간의 본성을 한탄하는 일 이외에는 별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미의 작용에 반대하고 그리고 경험에 기반을 둔 이 논지를 반박할 무서운 근거를 갖추고 있는 주목할 만한 목소리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말인즉, "미의 매력은 착한 사람의 손에 들어 있으면 찬양할 목적을 위해 작용할 수 있지만, 그러나 나쁜 사람의 손에 들어갈 경우에는 정반대의 것을 행하여 그 현혹적인 힘을 과오와 부정을 위해 사용할 수 있다. 그것은 또한 미의 본질에 모순되지 않는다. 취미는 단지 형식에만 주목하고 내용은 간과하기 때문에, 인간의 심정에게 결국에는 모든 현실성을 대체로 소홀히 하고, 매력적인 표현 때문에 진리나 도덕성을 희생하게 될 위험한 방향을 제시할 것이다. 사물들 사이의 모든 본질적인 차이가 사라지고, 오직 현상만이 사물들의 가치를 결정한다. "
그들은 또 계속해서 말합니다."미의 현혹적인 힘 때문에 수많은 유능한 사람들이 진지하고 긴장이 되는 활동으로 부터 이탈하거나 혹은 적어도 그 활동을 피상적으로 취급하려는 과오를 저지를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현실세계와는 전혀 다른 결과가 생겨나고, 어떤 전통적인 인습도 국민의 의견을 속박하지 않고, 인위가 자연본능을 억압하지 않는 하나의 시적 세계를 제시하는 것이 시인의 상상력에는 흡족하기 때문에, 많은 나약한 지성은 시민제도와 일치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시인들의 상상의 세계에 있어서 정열이 가장 화려한 색채를 과시하고 법칙과 의무와 싸워서 보통 영역을 확보한 이래, 그 정열은 어떤 위험한 웅변술을 터득하지 않았던가? 예전에는 진실이 지배했던 사교의 법칙을 이제는 미가 제시하고, 그리고 실질적인 공적만이 받아야 마땅할 존경을 외부적인 인상이 결정한다면, 사회는 과연 무엇을 얻게 되겠는가? 현상에 있어서 사람들의 호감을 살 수 있고 사회에 있어서 어떠한 가치를 부여하는 미덕이라면 모든 것이 번창한다. 그러나 그 반대라면 모든 탈선이 횡행하고 아름다운 겉치장과 타협하는 모든 악덕이 유행함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예술이 번창하고 취미가 지배하는 역사상 거의 모든 시대에 잇어서 인간성의 타락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어느 한 민족에게 있어서 높은 정도로 널리 보편화된 미적 문화가 정치적 자유 및 시민적 미덕과, 아름다운 관습이 선한 관습과, 그리고 태도의 우아함이 그 진실성과 융합되어 원만하게 발전한 실례를 단 하나도 역사상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은 틀림없이 깊은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제각기 독립을 주장하고 율법의 존중이 그들의 국가제도의 토대가 되고 있는 동안에 , 취미는 아직 성숙하지 못했고, 예술역시 아직 미숙한 상태에 있었으며, 그리고 미가 인간의 심정을 지배하기에는 아직 부족한 점이 많았습니다. 물론 시문학은 이미 숭고한 비약을 했지만, 그러나 그것은 단지 천재의 날개에 의해서만 비상했을 뿐입니다. 우리가 다 알고 있듯이 그것은 야만과 가장 가까이 경계를 이루고 흔히 암흑 속에서 빛나는 하나의 빛이었을 뿐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그 시대의 취미를 위해서 유리한 증언보다는 오히려 불리한 증언을 하고 있습니다. 페리클레스<=그리스 아테네의 정치가(499-429 B.C)>나 알렉사드로스<=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356-323 B.C>의 치하에서 예술의 황금시대가 도래하고 취미의 지배력이 널리 보급되었을 때, 그리이스의 힘과 자유는 더 이상 발견되지 않았고, 웅변술은 진실을 왜곡했고, 지혜는 소크라테스의 입에서 나왔지만 모욕을 받게 되었고 미덕은 포키온 장군의 태도에 나타났지만 모욕을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로마인들은 맨 처음에는 시민전쟁으로 자신들의 힘을 소모하고, 그 다음에는 동양의 사치를 통해서 무기력해지고, 결국에는 행복한 주권자의 멍에에 굴종한 연후에 희랍예술은 그들의 성격적 경직성을 극복하고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아라비아인들의 경우에 있어서도 압바스 왕조<=750-1280년 사이의 바그다드 회교도 교주들의 왕조, 모하메드의 백부 압바스의 후손들>의 왕흘 하에서 그들의 전투적인 정신의 기력이 완화될 때까지는 전혀 문화의 서광이 비치지 않았습니다. 근대 이탈리아에서는 찬란한 롬바르디아 자유도시 국가동맹이 깨어지고, 플로렌츠가 메디치 가문에 종속되고 자주정신이 저 용기가 넘치는 모든 도시에서 불명예스러운 항복에 자리를 양보한 후에 아름다운 예술이 나타났습니다. 근대국가들의 경우에 있어서 그들의 자주성이 종식하는 정도에 비례하여 그만큼 그들의 세련미가 증가한 실례는 너무나 많으므로 그것을 상기시키는 것은 거의 쓸데없는 일이나 다름없습니다. 어디로든 항상 과거의 세계로 시선을 돌리면, 거기에서 우리는 취미와 자유가 서로 반목하고, 미는 단지 영웅적인 미덕의 몰락위에만 그 지배의 토대를 구축한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지만 미적 문화를 얻기 위해서 보통 희생되곤 하는 이 영웅적 성격의 기력은 바로 인간에게 있어서 모든 우수하고 위대한 것들 가운에 가장 효율적인 용수철이며, 이것의 손실은 다른 어떤 훌륭한 장점을 가지고도 보충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까지의 경험들이 미의 영향에 관해서 가르쳐주는 것에만 오로지 집착할 경우, 실제로 우리는 인간의 진정한 문화에 매우 위험한 감정의 발달을 독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세련된 모든 장점에도 불구하고 미의 이완적 작용을 허락하는 것보다 차라리 조야와 무정이라는 성격상의 손해를 보더라도 미의 융화적인 힘을 습득하지 않고 지내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마도 경험은 이와 같은 미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법정이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경험이 말하는 증언에 대해서 중요성을 인정하기 전에, 우선 우리가 지금 논의하고 있는 미와 저 역사적 실례들이 불리한 증언을 하는 미가 동일한 것인지를 확실히 해둘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논의대상은 경험과는 다른 원천을 가진 미의 개념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경험에서 아름답다고 불리우는 것이 정당하게 그 명칭을 가질만한 것인지 어떤지는 오로지 저 개념에 의해서 판별되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미의 이 순수이성 개념은, 만일 그러한 것이 제시될 가능성이 있다면-이 개념은 하등의 현실적인 경우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현실적인 경우에 관한 우리들의 판단을 먼저 바르게 시정하고 지도하는 것이기 때문에 -추상의 방법으로 구해야 되고 그리고 감성적.이성적 자연의 가능성으로 부터 추정하여야 할 것입니다. 한마디로 해서 미는 인간성의 하나의 필연적인 조건으로서 제시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부터 인간성의 순수개념으로 향상되어야 합니다. 경험은 단지 개별적 인간들의 개별적 상태만을 제시할 뿐 결코 인간성을 제시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경험의 개별적이고 가변적인 현상방식으로 부터 절대적이고 불변하는 것을 발견해야 하고, 그리고 모든 우연한 한계를 제거함으로써 그 존재의 필연적인 조건을 장악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사실 이러한 선험적인 방법은 한동안 우리를 친숙한 현상세계와 사물의 생생한 현재로 부터 멀어지게 하고 순수추상개념의 세계에 머무르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절대로 동요하지 않는 인식의 확고한 근거를 얻으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현실을 과감하게 극복하지 못하는 사람은 결코 진리르르 획득하지 못할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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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의 원리에 입각하다.
미의 순수 이성 개념은, 추상의 방법으로 구해야 되고 감성적 이성적 자연의 가능성으로 부터 추정해야 한다. 미는 인간의 필연적 조건으로 제시도어야 하며, 이제 인간성의 순수개념으로 향상되어야 한다.
경험은 개별인간의 개별적 상태만 제시할 뿐이므로 절대적 불변하는 것을 발견해야 하고 그 존재의 필연적인 조건을 찾아야 한다. 이러한 선험적인 방법은 순수 추상개념의 세계에 머물게 한다. 그러나 이것은
인식의 확고한 근거를 얻으려는 노력이다. 현실을 과감하게 극복하지 못하면 진리를 얻을 수 없다.
인간성의 순수개념으로 향상된 미의 순수이성 개념은 우연성을 배제하고 절대적인 인식의 확고한 근거 속에서 찾을 수 있다.
그렇게 얻은 미의 순수이성 개념은 현재 세계의 이중적인 문제(구속과 해방을 주어야 하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조건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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