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미적 교육에 관한 서한 (12)

제 12 서한

우리들 내부에 있는 필연적인 것을 현실화하고 우리들 외부에 있는 현실적인 것을 필연성의 법칙에 종속시키는 이중의 임무를 실현하도록 우리는 상반된 두 힘으로 부터 강요를 받게 됩니다. 이 상반된 두 힘은 제각기 자신의 대상을 실현하도록 우리를 독려하는 까닭에 아주 적절하게 충동이라고 불리웁니다. 이 충동들 가운데 제가 감성적 충동 sinnlicher Trieb 이라고 부르려 하는 첫번째 충동은 인간의 물리적 현존 또는 그의 감성적 본성으로 부터 출발하고, 인간을 시간의 제한 속에서 두고 물질로 만드는 일<=오로지 자연법칙의 지배만을 받는 물리적 세계의 구성요소로 만드는 일>에 종사합니다. 그렇지만 이 충동은 그에게 물질을 받아들이고 불변하는 존재인 자기 자신과를 구별하는 인격의 자유로운 활동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물질이란 시간을 채우는 변화나 또는 현실성 이외에는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충동은 변화가 있을 것과 시간이 내용을 가질 것을 요구합니다. 단지 내용으로 채워진 시간에 불과한 이러한 상태는 감수(感受)라고 불리우며, 물리적 존재가 현신 (顯身)하는 것은 오직 그 상태 뿐입니다.

시간 속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연속해서 존재하기 때문에 어떤 것이 존재함으로써 그 밖의 다른 모든 것이 배제됩니다. 우리가 어떤 악기로 하나의 음을 내며 그 악기가 낼 수 있는 모든 음들 가운데 오직 이 유일한 음만이 실현된 것입니다. 인간이 현재적인 것을 느낄 때에는 그의 모든 무한한 규정 가능성들은 이러한 유일한 방식의 현존에 한정됩니다. 그러므로 이 감성적 충동이 배타적으로 작용하는 곳에서는 필연적으로 최고의 제한이 존재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인간은 양(量)의 단위, 즉 시간의 채워진 순간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결코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인격은 감각이 그를 지배하고 시간이 그를 잡아채는 한 지양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유한한 존재인 한, 이 감성적 충동이 지배합니다. 그리고 모든 형식이 단지 물질에만 나타나고, 모든 절대적인 것이 단지 제한의 매개를 통해서만 나타나기 때문에, 물론 인간성의 전 현상이 궁극적으로는 감성적 충동에 매어 있습니다. 비록 이 충동만이 인간성의 소질을 환기 시키고 신장시키시는 하지만, 인간성의 완성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도 이 감성적 충동입니다. 파괴할 수 없는 끈으로 이 충동은 더 높이 지향하는 제 정신을 감각세계에 결박하고, 그리고 추상을 무한 속으로의 그 가장 자유로운 편력으로부터 현재의 제한 속으로 도로 불러들입니다. 사고는 이 충동을 순간적으로 회피할 수 있고, 확고한 의지는 감성적 충동의 요구에 대항하여 승리를 얻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억압된 본능은 곧 바로 자신의 권리를 되찾아 존재의 현실성, 즉 우리들 인식의 내용과 우리들 행동의 목적을 강요합니다.

저 충동들 가운데 형식충동 Formtrieb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 두번째 충동은 인간의 절대적 존재 또는 그의 이성적 본능으로부터 출발하고, 인간을 자유롭게 하고, 인간의 현상의 다양성 속에 조화를 가져오고, 그리고 상태의 모든 변화에도 불구하고 그의 인격을 주장하려고 애씁니다. 인격은 절대적이고 불가분의 통일체로서 자기 자신과 결코 모순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영원히 우리들 자신이기 때문에, 인격의 주장을 강요하는 이 충동은 자기가 영원히 요구해야 하는 것 이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요구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형식충동은 자기가 지금 결정하는 것처럼 영원히 결정하고, 자기가 영원히 명령하는 것을 지금도 명령합니다. 따라서 이 충동은 시간의 전 연속을 포괄하며, 그것은 이 충동이 시간을 지양하고 변화를 지양하는 것과 동일한 의미입니다. 이 충동은 현실적인 것이 필연적이고 영원하기를 , 그리고 영원한 것과 필연적인 것이 현실적이기를 바랍니다. 달리 말해서 형식 충동은 진리와 정의를 지향합니다.

전자<=감성적 충동>는 단지 여러가지 경우들을 만드는 데 지나지 않는다면, 후자<=형식충동>는 법칙들을 부여합니다. 다시 말해서 형식 충동은 인식의 문제에 있어서는 각각의 판단을 위한 법칙들을, 행위<=실천>의 문제에 있어서는 각각의 의지를 위한 법칙들을 제시합니다. 우리가 하나의 대상을 인식하든지, 즉 우리가 우리들 주관의 어떤 상태에 객관적 타당성을 부여하든지 혹은 우리가 인식에 의해서 행동하든지, 즉 우리가 객관적인 것을 우리들 상태의 규정동기로 삼든지 간에 -이 두가지 경우에 있어서 우리는 상태를 시간의 관할권에서 빼내어 , 그 상태에 모든 인간과 모든 시대에 타당한 현실성, 즉 보편성과 필연성을 부여합니다. 감정은 오직 이 주관에게 있어서 그리고 이 순간에는 진실하지만, 그러나 다른 순간 다른 주관이 나타나면 현재의 감수 (感受)의 진술을 철회할 수도 있다라고 말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사상<=이성>이 한번 그렇다라고 말할 때에는, 그것은 영원히 그렇게 결정한 것이며, 그 진술의 타당성은 일체의 변화를 거부하는 인격 자체를 통해서 보증된 것입니다. 성향은 오직 너 개인을 위해 그리고 너의 현재의 욕구를 위해서 좋지만, 너 개인과 너의 현재의 욕구는 변화를 통해 일소될 수도 있고, 네가 지금 열렬하게 욕구하는 것은 언젠가는 너의 혐오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라고 말할 뿐입니다. 그러나 도덕적인 감정이 한번 그래야만 한다 라고 말할 때에는, 그것은 영원히 그렇게 결정합니다. -네가 진리를 진리인 까닭에 고백하고 정의를 정의인 까닭에 실행한다면, 너는 이미 하나의 개별적인 경우를 모든 경우에 타당한 법칙으로 만든 셈이고, 너의 삶의 한 순간을 영원으로서 취급한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형식충동이 지배하고 우리 내부에서 순수객관이 활동할 때, 존재는 최고도로 확대되고 ,모든 제한이 사라지고, 그리고 인간은 보잘것 없는 감각에 의해서 제한되었던 양의 단위에서 벗어나 현상의 전 영역을 포괄하는 이념의 단위 Ideeneinheit로 향상됩니다. 이러한 조작이 이루어질 때 우리는 더이상 시간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간이 끝없이 연속적으로 우리들 내부에 존재합니다. 우리는 더이상 개체가 아니고 종(種)이 됩니다. 즉 모든 정신들의 판단이 우리들 정신을 통해서 표현되고, 모든 심정들의 선택이 우리들의 행동을 통해서 대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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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 다시 공부해야 겠다.
진정한 자유를 위해... '21세기 소년이 생각난다. 켄지...' 켄지들...요시츠네...요시츠네들....

by 나시니 | 2009/04/23 23:14 | 트랙백 | 덧글(0)

인간의 미적 교육에 관한 서한 (11)

제 11서한

추상은 언제나 최고의 높이까지 올라가면 정지해서 자신의 한계를 인정해야 하는 두가지 종국개념에 도달합니다.
추상은 인간에게 있어서 지속적인 것과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을 구분합니다. 추상은 지속적인 것을 그의 인격이라 부르고, 변화하는 것을 그의 상태라고 부릅니다.

인격과 상태-자아와 그 규정요소-는 절대적 존재<=신>에게 있어서는 하나이지만, 유한한 존재<=인간>에게 있어서는 영원히 둘로 갈라져 있습니다. 인격의 지속에도 불구하고 상태는 변화하면, 상태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인격은 지속합니다. 우리는 휴식으로부터 활동으로, 격정으로 부터 무관심으로, 조화로부터 모순으로 옮겨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항상 머물러 있으며, 그리고 우리들에게서 직접 생겨나는 결과 역시 그대로 지속합니다. 오로지 절대적인 주체에게 있어서만 인격과 더불어 일체의 그 규정요소도 인격에서 흘러나오는 까닭에 불변합니다. 신성이란 모든 것은 존재하기 때문에 신성입니다. 따라서 신성은 영원하기 때문에 영원히 전부인 것입니다.

유한한 존재로서의 인간에게 있어서 인격과 상태는 서로 상이하기 때문에, 상태가 인격을 근거로 할 수도 인격이 상태를 근거로 할 수도 없습니다. 후자의 경우라면 인격은 변화할 수 밖에 없을 것이고, 전자의 경우라면 상태는 불변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각각의 경우에 있어서 인격이나 또는 유한성이 지양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사고하고 의욕하고 감각하는 까닭에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우리는 존재하는 까닭에 사고하고 의욕하고 감각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존재하는 까닭에 존재합니다. 우리의 외부에 다른 어떤 것이 존재하는 까닭에 우리는 감각하고 사고하고 의욕합니다.

그러므로 인격은 자기 자신의 근거라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지속적인 것은 변화로부터 흘러나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절대적이고 자기 자신속에 근거를 둔 존재의 이념, 즉 자유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다른 한편 상태는 자신 이외의 다른 어떤 근거를 가져야 합니다. 상태는 인격을 통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즉 절대적이지 않기 때문에 다른 어떤 것에서 생겨나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두번째로 모든 의존적인 존재나 또는 생성의 조건, 즉 시간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시간은 모든 생성의 조건이다." 라는 말은 동일성의 명제입니다. 왜냐하면 이 명제는 연속이란 그 무엇이 뒤따라서 생겨나는 조건이다라는 것만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원히 불변하는 자아속에 나타나고 그리고 오직 그 속에서만 나타나는 인격은 생성될 수 없고, 시간 속에서 시작될 수도 없습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시간이 인격속에서 시작되어야 하고, 어떤 불변적인 것이 변화의 근거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변화가 일어나야만 한다면 변화할 무엇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무엇은 그 자체가 절대 변화일 수가 없습니다. 꽃이 피고 시든다고 말하면서, 우리는 꽃을 이러한 변화 속에서 불변하는 것으로 삼는 동시에, 그 꽃에게 저 두가지 상태를 나타내는 인격을 부여합니다. 인간은 우선 생성되어야 한다는 말은 이러한 사실에 대한 반박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결코 인격자체가 아니라, 어떤 특정한 상태 속에 있는 인격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든 상태, 즉 모든 일정한 존재는 시간 속에서 생성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상으로서의 인간 역시 비록 자신속의 순수지성이 영원할지라도 그렇게 시작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시간이 없으면, 다시 말해서 시간이 생성되지 않는다면 인간은 결코 하나의 특정한 존재가 되지 못하겠지만, 실제 속에는 존재하지 못할 것입니다. 오로지 연속적인 표상을 통해서만 불변하는 자아는 현상으로서의 자기 자신을 인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활동의 재료, 다시 말해서 최고의 지성<=신>이 자기 스스로로 부터 끌어낸 현실성을 먼저 수용해야 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인간은 지각의 도정에서 그 활동성을 공간상으로는 자기 외부에 존재하는 것으로, 시간상으로는 자기 내부에서 변화하는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내부에서 변화하는 소재를 결코 변화하지 않는 그의 자아가 동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변화 속에서 그가 항상 자기 자신을 지속하는 것, 모든 지각을 경험으로, 즉 인식의 단위로 만드는 것, 그리고 시간 속에서 자신의 모든 현상방식을 영원히 보편타당한 법칙으로 만드는 것은 이성적 본능에 의해서 인간에게 부과되어 있는 명령입니다. 오직 변화함으로써만 인간은 존재합니다. 또한 오직 변화하지 않은 채로 있음으로써만 그는 존재합니다. 따라서 완전한 인간은 변화의 큰 물결속에서 영원히 자기 자신으로 남아 있는 불변의 통일체일 것입니다.

비록 무한한 존재, 즉 하나의 신이 될 수가 없을지라도 우리는 신의 가장 본질적인 특징, 즉 그 능력의 절대적인 알림(모든 가능성의 현실성)과 그 현상의 절대적인 통일(모든 현실적인 것의 필연성)을 자신의 무한함 임무로서 가지는 하나의 경향을 신적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이 신성에 이르는 소질을 인간은 분명히 자신의 인격 속에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 신성에 이르는 소질을 인간은 분명히 자신의 인격속에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 신성에 이르는 길은, 결코 목적지에 이르지 못하는 것을 하나의 길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인간의 감성속에 열려 있습니다.

인간의 인격은 그 자체만으로는 그리고 모든 감성적 소재로 부터 독립해서 관조될 때에는 그의 본성의 무한한 표현가능성을 위한 소질에 불과할 뿐입니다. 인간은 직관과 감각을 못하는 한 형식과 비어 있는 능력 이외에는 더이상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의 감성은 그 자체만으로는 그리고 정신의 모든 자아 활동으로부터 분리해서 관조될 때에는 감성이 없이는 단지 형식에 불과한 인간을 재료로 만드는 일 밖에는 할 수 없으며, 더욱이 그 재료를 인간과 결합시키는 일은 결코 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이 단순히 감각하고 욕구하고 그리고 단순한 욕구에의해서 활동하는 한, 만약 우리가 세계라는 명칭을 시간의 형식없는 내용만으로 이해한다면, 그는 세계 이외에는 더이상 아무것도 아닙니다. 인간의 능력을 활동력으로 만드는 것은 그의 감성 뿐이지만, 오직 그의 인격만이 그의 활동을 그의 것으로 만듭니다. 그러므로 단순한 세계<=자연세계>이지 않기 위해서 인간은 재료에 형식을 부여해야합니다. 반면에 단순한 형식이지 않기 위해서 인간은 자신 속에 지니고 있는 소질에 현실성을 부여해야 합니다. 시간을 만들어 내고 불변하는 것에 변화를, 그의 자아의 영원한 통일성에 자연세계의 다양성을 대립시킬 때, 인간은 형식을 실현합니다. 시간을 다시 지양하고, 변화 속에서 불변을 주장하고 또 세계의 다양성을 그의 자아의 통일성에 예속시킬 때, 인간은 재료를 형성합니다.

이것<=이러한 두 가지 존재론적 요소>으로 부터 이제 인간에 대한 두 가지 상반된 요구, 즉 감성적 · 이성적 본능의 두가지 기본법칙이 생겨납니다. 첫번째 법칙은 절대적 현실성Realität을 지향합니다. 즉 인간은 단지 형식에 불과한 것 일체를 세계로 만들어야만 하고, 모든 자신의 소질을 발현시켜야 합니다. 두번째 법칙은 절대적 형식성Formalität을 지향합니다. 즉 인간은 단지 세계에 불과한 것 일체를 자신 속에서 말살해야만 하고, 모든 자신의 변화 속에 조화를 이룩해야만 합니다. 달리 말해서 그는 일체의 내면적인 것을 외면화하고 일체의 외면적인 것에 형식을 부여해야 합니다. 이 두가지 임무가 가장 완전하게 실현될 경우, 우리는 제가 출발점으로 했던 그 신성의 개념에 다시 이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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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분법
절대적 불변의 가치와 변화하는 상태
외부의 존재에 의해 감각하고 사고하고 의욕하는 인간의 근거는 불변의 인격, 즉 자기 자신의 근거.
영원히 불변하는 자아, 인격은 생성되거나 시간 속에서 시작될 수 없음
그러나 인간이 하나의 특정한 존재가 되려면 시간 속에서 생성될 수 밖에 없음
오로지 연속적인 표상을 통해서만 불변하는 자아는 현상으로서의 자신을 인식하게 됨

인간은 지각활동에서 공간상 자기 외부의 존재에 대해, 시간상 자기 내부의 변화로 받아들임
이 내부의 변화에 동반하는 것이 그의 자아임

인간은 모든 변화 속에서 자신을 지속시키고, 모든 경험, 즉 인식의 단위로 만들며, 시간 속에서 자신의 모든 현상 방식을 영원히 보편타당한 법칙으로 만드는 것이 이성적 본능에 의하여 인간에게 부과되어 있는 명령임.

완전한 인간은 변화의 큰 물결 속에서 영원히 자기 가신으로 남아 있는 불변의 통일체

신적인 것이란 그 능력의 절대적인 알림 (모든 가능성의 현실성)과 그 현상의 절대적인 통일(모든 현실적인 것의 필연성)을 자신의 무한한 임무로서 가지는 하나의 경향임
이 신성에 이르는 소질을 인간은 분명히 자신의 인격 속에 포함하고 있음
인간의 감성 속에 열려 있는 형태인 하나의 길

감성적 본능의 법칙은 절대적 현실성을 지향
이성적 본능의 법칙은 절대적 형식성을 지향

내면적인 것의 외면화, 외면적인 것에 형식부여가 완전하게 실현되면 神性 의 개념에 이르게 됨

by 나시니 | 2009/04/20 23:35 | 트랙백 | 덧글(0)

인간의 미적 교육에 관한 서한(10)

제 10서한

당신께서는 인간이 상반된 두 길로 자신의 목적을 이탈 할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우리 시대는 실제로 이 두 사도(邪道)를 헤매며 한편으로는 조야의, 다른 한편으로는 이완과 전도의 희생이 되고 있다는 사실에 있어서 저와 일치하시고, 또 저의 앞 선 서한들의 내용을 통해서 그 사실을 확신하고 계십니다. 이러한 이중의 혼란으로 부터 우리 시대는 미를 통해 회복되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어떻게 미적 교육은 이 상반된 두 결함과 동시에 대처해서 이 모순된 두 특성을 자신 속에서 결합할 수 있겠습니까?
미적 교육은 과연 야만인의 경우 본성<=자연적 충동>을 쇠사슬로 묶어 놓고 비문화인의 경우 그것을 자유롭게 풀어놓을 수가 있겠습니까? 미적 교육이 구속과 동시에 해방을 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만약에 미적 교육이 이 두가지 일을 실행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우리는 인간성의 완성이라는 중요한 결과를 그것으로부터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미에 대해 발달한 감정은 풍습을 세련시킨다는 주장을 우리는 이미 넌더리 나도록 들었습니다.
이러한 주장은 명쾌한 지성, 활발한 감정, 관용 및 심지어는 품위있는 태도마저도 거의 일반적으로 세련된 취미와 결합시키고, 그 반대의 것은 보통 세련되지 못한 취미와 결합시키는 일상의 경험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또한 고대의 가장 교화된 민족<=희랍인>의 경우 미적 감정 역시 최고로 발달했다는 실례와 동시에, 그 반대로 일부는 야만적이고 일부는 미개한 민족의 경우 미에 대한 무감각의 댓가로 조잡하거나 무뚝뚝한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는 실례를 근거로 삼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상가들의 생각은 때때로 그 사실을 부인하거나 혹은 그 사실로부터 도출된 결론의 합법성을 의심합니다. 그들은 미개한 민족들이 비난받는 저 야만을 전적으로 그렇게 나쁘게만 생각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그들은 개화된 민족들이 칭찬받는 이 세련된 전적으로 그렇게 좋게만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이미 고대에 미적 문화를 결코 은총이라고 간주하지 않고,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상상력의 예술가들이 자기들의 공화국에 들어오는 것을 거부하는 경향이 심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컨데 플라톤의 [국가론]은 부분적으로 예술가들이 그의 공화국에 들어오는 것을 거부하고 있다.>

저는 오직 자신들이 고대 로마의 우미의 세 여신들<=희랍신화에서는 Aglaia, Euphrosyne, Thalia>이 베푸는 은총을 결코 한번도 경험하지 못했다는 이유 때문에 그 여신들을 비방하는 사람들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획득의 노고와 손에 잡을 수 있는 이득 이외에는 어떤 다른 가치척도를 모르는 그들이 어떻게 인간의 내부와 외부에 대한 취미의 조용한 노력의 가치를 인정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어떻게 그들이 미적 문화의 우연한 단점들 때문에 그 본질적인 장점들을 도외시하지 않겠습니까? 형식을 갖추지 목한 인간<=세련되지 못하고 예의 범절과 격식을 갖추지 못한 조야한 인간>은 모든 우아한 화술을 아첨이라고, 모든 세련된 사교를 위장이라고, 모든 섬세하고 고결한 태도를 지나친 긴장과 점잖뺌이라고 하여 경멸합니다. 그는 우미의 여신들의 총아가 자신의 동반자로소 모든 행동 반경을 명랑하게 하고, 사무가로서 모든 두뇌들을 자기의 의도대로 지배하고, 그리고 작가로서 자신의 세기 전체에 자신의 정신을 불어 넣은 것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런 반면에 근면의 희생자인 그는 자신의 모든 지식을 가지고서도 결코 주목받지 못하고, 그 자리로부터 어떤 장해물 하나도 제거할 수가 없습니다. 그는 저 우미의 총아로부터 쾌적하게 지내는 독창적인 비밀을 결코 터득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본질보다는 오히려 가상을 섬기는 전도된 인간의 본성을 한탄하는 일 이외에는 별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미의 작용에 반대하고 그리고 경험에 기반을 둔 이 논지를 반박할 무서운 근거를 갖추고 있는 주목할 만한 목소리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말인즉, "미의 매력은 착한 사람의 손에 들어 있으면 찬양할 목적을 위해 작용할 수 있지만, 그러나 나쁜 사람의 손에 들어갈 경우에는 정반대의 것을 행하여 그 현혹적인 힘을 과오와 부정을 위해 사용할 수 있다. 그것은 또한 미의 본질에 모순되지 않는다. 취미는 단지 형식에만 주목하고 내용은 간과하기 때문에, 인간의 심정에게 결국에는 모든 현실성을 대체로 소홀히 하고, 매력적인 표현 때문에 진리나 도덕성을 희생하게 될 위험한 방향을 제시할 것이다. 사물들 사이의 모든 본질적인 차이가 사라지고, 오직 현상만이 사물들의 가치를 결정한다. "
그들은 또 계속해서 말합니다."미의 현혹적인 힘 때문에 수많은 유능한 사람들이 진지하고 긴장이 되는 활동으로 부터 이탈하거나 혹은 적어도 그 활동을 피상적으로 취급하려는 과오를 저지를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현실세계와는 전혀 다른 결과가 생겨나고, 어떤 전통적인 인습도 국민의 의견을 속박하지 않고, 인위가 자연본능을 억압하지 않는 하나의 시적 세계를 제시하는 것이 시인의 상상력에는 흡족하기 때문에, 많은 나약한 지성은 시민제도와 일치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시인들의 상상의 세계에 있어서 정열이 가장 화려한 색채를 과시하고 법칙과 의무와 싸워서 보통 영역을 확보한 이래, 그 정열은 어떤 위험한 웅변술을 터득하지 않았던가? 예전에는 진실이 지배했던 사교의 법칙을 이제는 미가 제시하고, 그리고 실질적인 공적만이 받아야  마땅할 존경을 외부적인 인상이 결정한다면, 사회는 과연 무엇을 얻게 되겠는가? 현상에 있어서 사람들의 호감을 살 수 있고 사회에 있어서 어떠한 가치를 부여하는 미덕이라면 모든 것이 번창한다. 그러나 그 반대라면 모든 탈선이 횡행하고 아름다운 겉치장과 타협하는 모든 악덕이 유행함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예술이 번창하고 취미가 지배하는 역사상 거의 모든 시대에 잇어서 인간성의 타락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어느 한 민족에게 있어서 높은 정도로 널리 보편화된 미적 문화가 정치적 자유 및 시민적 미덕과, 아름다운 관습이 선한 관습과, 그리고 태도의 우아함이 그 진실성과 융합되어 원만하게 발전한 실례를 단 하나도 역사상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은 틀림없이 깊은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제각기 독립을 주장하고 율법의 존중이 그들의 국가제도의 토대가 되고 있는 동안에 , 취미는 아직 성숙하지 못했고, 예술역시 아직 미숙한 상태에 있었으며, 그리고 미가 인간의 심정을 지배하기에는 아직 부족한 점이 많았습니다. 물론 시문학은 이미 숭고한 비약을 했지만, 그러나 그것은 단지 천재의 날개에 의해서만 비상했을 뿐입니다. 우리가 다 알고 있듯이 그것은 야만과 가장 가까이 경계를 이루고 흔히 암흑 속에서 빛나는 하나의 빛이었을 뿐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그 시대의 취미를 위해서 유리한 증언보다는 오히려 불리한 증언을 하고 있습니다. 페리클레스<=그리스 아테네의 정치가(499-429 B.C)>나 알렉사드로스<=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356-323 B.C>의 치하에서 예술의 황금시대가 도래하고 취미의 지배력이 널리 보급되었을 때, 그리이스의 힘과 자유는 더 이상 발견되지 않았고, 웅변술은 진실을 왜곡했고, 지혜는 소크라테스의 입에서 나왔지만 모욕을 받게 되었고 미덕은 포키온 장군의 태도에 나타났지만 모욕을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로마인들은 맨 처음에는 시민전쟁으로 자신들의 힘을 소모하고, 그 다음에는 동양의 사치를 통해서 무기력해지고, 결국에는 행복한 주권자의 멍에에 굴종한 연후에 희랍예술은 그들의 성격적 경직성을 극복하고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아라비아인들의 경우에 있어서도 압바스 왕조<=750-1280년 사이의 바그다드 회교도 교주들의 왕조, 모하메드의 백부 압바스의 후손들>의 왕흘 하에서 그들의 전투적인 정신의 기력이 완화될 때까지는 전혀 문화의 서광이 비치지 않았습니다. 근대 이탈리아에서는 찬란한 롬바르디아 자유도시 국가동맹이 깨어지고, 플로렌츠가 메디치 가문에 종속되고 자주정신이 저 용기가 넘치는 모든 도시에서 불명예스러운 항복에 자리를 양보한 후에 아름다운 예술이 나타났습니다. 근대국가들의 경우에 있어서 그들의 자주성이 종식하는 정도에 비례하여 그만큼 그들의 세련미가 증가한 실례는 너무나 많으므로 그것을 상기시키는 것은 거의 쓸데없는 일이나 다름없습니다. 어디로든 항상 과거의 세계로 시선을 돌리면, 거기에서 우리는 취미와 자유가 서로 반목하고, 미는 단지 영웅적인 미덕의 몰락위에만 그 지배의 토대를 구축한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지만 미적 문화를 얻기 위해서 보통 희생되곤 하는 이 영웅적 성격의 기력은 바로 인간에게 있어서 모든 우수하고 위대한 것들 가운에 가장 효율적인 용수철이며, 이것의 손실은 다른 어떤 훌륭한 장점을 가지고도 보충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까지의 경험들이 미의 영향에 관해서 가르쳐주는 것에만 오로지 집착할 경우, 실제로 우리는 인간의 진정한 문화에 매우 위험한 감정의 발달을 독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세련된 모든 장점에도 불구하고 미의 이완적 작용을 허락하는 것보다 차라리 조야와 무정이라는 성격상의 손해를 보더라도 미의 융화적인 힘을 습득하지 않고 지내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마도 경험은 이와 같은 미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법정이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경험이 말하는 증언에 대해서 중요성을 인정하기 전에, 우선 우리가 지금 논의하고 있는 미와 저 역사적 실례들이 불리한 증언을 하는 미가 동일한 것인지를 확실히 해둘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논의대상은 경험과는 다른 원천을 가진 미의 개념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경험에서 아름답다고 불리우는 것이 정당하게 그 명칭을 가질만한 것인지 어떤지는 오로지 저 개념에 의해서 판별되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미의 이 순수이성 개념은, 만일 그러한 것이 제시될 가능성이 있다면-이 개념은 하등의 현실적인 경우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현실적인 경우에 관한 우리들의 판단을 먼저 바르게 시정하고 지도하는 것이기 때문에 -추상의 방법으로 구해야 되고 그리고 감성적.이성적 자연의 가능성으로 부터 추정하여야 할 것입니다. 한마디로 해서 미는 인간성의 하나의 필연적인 조건으로서 제시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부터 인간성의 순수개념으로 향상되어야 합니다. 경험은 단지 개별적 인간들의 개별적 상태만을 제시할 뿐 결코 인간성을 제시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경험의 개별적이고 가변적인 현상방식으로 부터 절대적이고 불변하는 것을 발견해야 하고, 그리고 모든 우연한 한계를 제거함으로써 그 존재의 필연적인 조건을 장악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사실 이러한 선험적인 방법은 한동안 우리를 친숙한 현상세계와 사물의 생생한 현재로 부터 멀어지게 하고 순수추상개념의 세계에 머무르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절대로 동요하지 않는 인식의 확고한 근거를 얻으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현실을 과감하게 극복하지 못하는 사람은 결코 진리르르 획득하지 못할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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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의 원리에 입각하다.
미의 순수 이성 개념은, 추상의 방법으로 구해야 되고 감성적 이성적 자연의 가능성으로 부터 추정해야 한다. 미는 인간의 필연적 조건으로 제시도어야 하며, 이제 인간성의 순수개념으로 향상되어야 한다.
경험은 개별인간의 개별적 상태만 제시할 뿐이므로 절대적 불변하는 것을 발견해야 하고 그 존재의 필연적인 조건을 찾아야 한다. 이러한 선험적인 방법은 순수 추상개념의 세계에 머물게 한다. 그러나 이것은
인식의 확고한 근거를 얻으려는 노력이다. 현실을 과감하게 극복하지 못하면 진리를 얻을 수 없다.

인간성의 순수개념으로 향상된 미의 순수이성 개념은 우연성을 배제하고 절대적인 인식의 확고한 근거 속에서 찾을 수 있다.

그렇게 얻은 미의 순수이성 개념은 현재 세계의 이중적인 문제(구속과 해방을 주어야 하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조건이 된다.

by 나시니 | 2009/04/18 00:50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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